나는 늘 모든 게 늦다. 처음 마주한 공간에, 사람에 적응하는 것도, 이미 내어준 마음의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도. 그래서 여행을 하고 나면 그 후유증을 꽤 오래 앓는 편이다. 그게 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인 쪽이든. 이번 여행은 유난히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보낸 날들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애써 시간을 더듬어 보면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사람이다.
한 번의 인연이 영원하기 어렵다는 것쯤은 쿨하게 인정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나는, 한 번 스쳐지나는 인연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음도 안다. 이번 여행으로 스친 낯선 존재들과의 쌓았던 시간들이 상처받고 힘들었던 과거의 나에게 위로가, 여전히 흔들리는 현재의 나에게 찰나의 여유가, 조금은 더 자랄 미래의 나에게 지혜가 될 것임을 믿는다. 나와 함께한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이 짧은 시간들이 삶의 쉼과 힘이 되길.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이번 나의 선택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길에 아주 작은 보탬이 되었길 소망한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매일 내가 행하는 경제적 선택과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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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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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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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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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트래킹에 앞서 짐을 두 개로 나눴다. 2박 3일 치의 짐을 배낭에 싸고 나머지 짐은 캐리어에 넣어 차량으로 이동시켰다. 배낭을 메고 트래킹을 하는 건 무리라는 가이드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짐을 말에 실었다. 우리의 짐을 등에 싣고 험난한 길을 오르는 말을 보고 있자니 인간으로 태어난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물론 인간의 삶도 녹록진 않지만.
해발고도 2000m이 넘는 공간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걸어가면서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말로만 듣던 고산병이 찾아온 것이었다. 나보다 증상이 심한 언니는 결국 말을 타고 트래킹에 임했고 나는 긴 호흡을 반복하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나시족 가이드 2명과 우리나라 가이드 1명이 14명과 함께 했고 트래킹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속도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느리다고 재촉하거나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걷고, 각자의 감정에 맞춰 풍경을 감상할 따름이었다. 그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덕인지 나와 언니는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고산지역에 익숙해져갔다.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만난 식당은 너무도 반가웠다. 배고픔보다 무거워진 몸을 기대 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앞섰다. 물론 눈앞에 음식이 세팅되는 순간 피로감에 물러났던 식욕이 튀어나왔지만.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의자에 널브러져 창밖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실내 인테리어가 따로 필요 없이 그저 커다란 창만 내면 훌륭한 식당이 되었다. 창문을 열면 훅 들어오는 바람은 에어컨에서 쏟아 나오는 인위적으로 차갑고 건조한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신선함을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마객잔의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잔잔하고 고요한 풍경이 마음까지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특히, 옥상에 마련되어 있는 선베드와 흔들 그네 의자는 내 마음을 완전히 뺏었다. 트래킹과 점심 식사로 노곤해진 몸을 시원한 바람의 손길에 맡기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물론 그때의 장렬한 햇볕에 내 몸이 바싹 타버렸지만 쉼의 대가로 여긴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달콤한 휴식이었다.
달콤한 쉼 이후에 다시 시작된 트래킹. 잠깐의 휴식으로 걸으면서 풍경을 돌아볼 여유를 다시 찾게 되었다. 걸을 때마다 달라지는 향기가 신비로웠다. 온갖 시끄러운 소음과 혼잡한 냄새에 뒤섞여 마비되어 있던 오감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풀내음, 물에 녹은 흙냄새, 은은하게 퍼지는 이름 모를 들꽃향...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른 향이 다가왔다 사라졌다. 눈앞에 펼쳐지는 날카로우면서도 관대한 산맥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풍경의 동일성과 달리 시시각각 변하는 사소한 풍경의 다채로움은 트래킹의 지루함을 잊게 했다.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땀으로도 더위가 떨어지지 않을 때, 저 멀리서 들리는 폭포수의 소리만으로도 체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미숫가루 줄기가 흐르는 금사강이 나무줄기 사이로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역시 시원함이 전해졌다. 걸음이 꾸준히 이어지다 보면 폭포와 강, 야생화 같이 작은 풍경뿐 아니라 커다란 산맥의 풍경에도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나무로 뒤덮여 푸르름을 자랑하는 산과 군데군데 허연 뼈대를 드러내는 돌산, 층층이 지층을 드러내는 산까지. 자연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의 향연이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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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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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국내선을 놓치면서 북경에서 하루를 지연한 탓에 이후의 스케줄이 조금 조정되었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날이 바로 네 번째 하루였는데, 그래서 새벽 6시 반에 기상하여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공교롭게 같이 하루를 묵었던 다른 한국 일행들과 아침 스케줄이 동일했다. 가이드에 따르면, 호도협 트래킹을 상품으로 한 한국 여행사가 트래블러스 맵 이외에 한 곳 더 있다고 했었는데 그 무리였던 것 같다. '경쟁사에 비해 트래블러스 맵의 상품이 가지는 경쟁력이 무엇이냐'고 묻던 정희 언니의 질문에 가이드는 '현지인의 경제 활성화'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소비자의 윤리성에 기대지 않더라도, 여행자의 합리적 선택에 근거하더라도 이 상품만의 경쟁력과 매력은 충분히 존재했으며, 그것을 가장 확실히 느낀 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밤새 세차게 내린 비 탓에 풍경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더욱 몽환적이었다. 가이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끄러운 길을 걱정하며 속도를 내지 말고 안전에 유의하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비가 만들어낸 새로운 정경에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변화무쌍한 날씨가 우리의 앞날에 예측 불가능성을 더해주었지만 그와 더불어 여행의 아름다움 역시 선물하고 있었다. 간밤의 폭우로 깨끗하게 씻어낸 맑은 모습과 듬성듬성 자리 잡던 농도 짙은 구름 대신 옅게 흩뿌려진 연기들이 한 폭의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냈다. 이 여행의 매력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었다. 트래킹 자체에 매몰되기보다는 저마다 자기 페이스에 따라, 자기의 스타일에 따라 주변을 즐길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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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두성 마을 도착 후,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가이드를 따라서 이웃집에 들렀더니 이미 마당에는 우리를 위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서로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는 넘치는 정을 가득 안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술잔을 부딪히면서 상대의 표정을 섬세하게 관찰했다. 그게 우리만의 의사소통이었고, 그 단순한 감정 교환만으로도 충분했다. 미스터 무와 무란, 안주인의 노래, 그리고 우리 가이드의 답가 등 서로의 흥이 오갔고 넘쳐 오르는 흥 속에서 미스터 무는 우리에게 나시족 전통 춤을 가르쳐주었다. 강강술래처럼 큰 원을 만들어 선 여성들이 간단한 동작을 하며 한 방향으로 돌면,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 옆으로 가서 춤을 춘다는 것이다. 만약,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면 남자는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고, 둘이 다른 마음이라면, 남자는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 산골에 살면서 서로 왕래가 적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청춘 남녀가 눈 맞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일어나서 나시족의 전통춤을 추었고 진짜 그들의 '손님'이자 '친구'가 되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방이 트인 작은 마당(?)에 모여 앉았다. 소리가 날 때마다 반응하여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 빛들을 바라보며 환호하기도 했고, 소리 없이 번쩍거리는 번개를 보며 서울 하늘에 존재할지도 모를 번개에 대해서 시답지 않은 논쟁을 펼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그냥 스쳐지났을, 어쩌면 하찮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사소함에도 귀 기울이고, 신기해하는 천진한 우리의 모습이 낯설지만 행복했다. 낯설게 빛나던, 그래서 더 붙잡고 싶던 우리의 밤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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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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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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